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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참 힘들죠? 근데 내일은 지금보다 덜 힘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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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추천도서)+감상평

[무라카미 하루키] '레더호젠'

duaidot 2026. 1. 5. 17:47

읽고 나서 남는 감정은 묘하게 “우스꽝스러운 물건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는 당혹감과, 그 당혹감 너머에 숨은 어떤 진실의 무게였다. 레더 호젠이라는 반바지는 이야기의 겉모양을 우스워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사소한 계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형태를 얻는 도화선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독일에서 혼자 여행을 하며 느낀 해방감, 낯선 풍경과 친절한 사람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감정들은 “가정”이란 이름으로 눌려 있던 자아가 잠깐이라도 숨을 쉬게 되는 순간 같았다. 그 자유의 경험이, 돌아가야 할 일상과 남편의 존재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버린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어머니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일인 노인들과 모델이 된 남자가 농담을 주고받는 평범하고도 무해한 30분. 그런데 그 평범함이 오히려 잔인하다. 그 장면은 ‘어디서나 사람들은 웃고, 세상은 별일 없이 굴러가며, 나는 왜 이렇게 숨 막히게 살고 있지?’ 같은 질문을 불쑥 튀어나오게 만든다. 어머니는 남편의 구체적인 잘못을 새로 발견한 게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있었던 혐오와 피로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외도의 폭로나 경제적 파탄 같은 설명 가능한 이유 대신,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바닥을 보여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더는 애정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딸의 시선도 오래 남는다. ‘아버지를 버린 것’보다 ‘나까지 버린 것’이 더 큰 상처였다는 고백은, 가족이 깨질 때 아이가 받는 충격의 핵을 정확히 찌른다. 그런데도 딸이 결국 어머니를 미워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씁쓸하면서도 이해가 됐다. 어떤 선택은 옳고 그름으로만 판결할 수 없고, 특히 여성의 삶에서 결혼·가정·자아의 충돌은 한 번쯤은 이유를 설명할 언어 자체가 부족한 영역으로 남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건, 레더 호젠 가게의 ‘규칙’이다. “신용”을 위해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고집은 처음엔 답답하게 보이지만, 그 단단함이 오히려 어머니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지켜온 것들(가정, 성실함, 참을성)이 사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방식으로만 유지돼 왔다면, 그곳의 규칙은 “어떤 삶은 그렇게까지 단단히 지켜지는데, 내 삶은 왜 이렇게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지?”라는 비교를 만들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선물 요청이었던 반바지가, 남편과 가정을 해체하는 촉매가 된다.

결국 이 글은 “반바지 때문에 이혼했다”는 황당한 한 줄 요약이 아니라, 자립과 혐오, 자유의 기억이 한 점으로 수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웃기고 기묘한 에피소드처럼 시작하지만, 끝에서는 누구나 마음 한편에 품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읽고 나니 사소한 계기 하나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이미 안에서 자라고 있던 진심이 계기를 만나 모습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인트는 정말 ‘반바지’에 있다기보다, 반바지가 드러내 버린 감정의 진짜 형태에 있었다.